초모랑마 별이된 박무택 [히말라야] [안나푸르나]트레킹 삶과 죽음! 신이 부르는 곳으로 떠난다.
"먼저 이태원의 푸른 영혼들에게 머리 숙여 애도합니다. 부디 가시는 길 편안히 영면하소서!
죽음 뒤에도 집은 있어야 하니 부디 좋은 방 하나 얻어 오늘 밤은 편히 주무시오."
몸은 혼(魂)을 담는 그릇이다.
인간은 길 위에 서있는 존재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빚과 그림자 그리고 어둠!
어둠은 정말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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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어둠도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이곳 에 와서 느꼈다.
고천암 자연생태공원 길 100리를 걸으며
칠흑 같은 어둠과 마주쳤다.
스마트폰 손전등을 켰다. 내비를 작동시켰다. 그러나. 나는 길을 잃었다.
간척지 경운기 길을 헤매고 다녔다.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을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해댔다. 세상에 가로등 하나 없이, 길을 잃게 만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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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들도 잠을 자야 한다고!.. 알곡을 탱탱하게 여물게 하기 위함인 것을!
땅끝마을에 와서야 알았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운명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상은 기억의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그 옛날 내가 한 때 살았던 곳!..
그저 벼랑끝에서 닳아빠진 외줄을 만지작 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 놓아버릴 미래의 어느 날을 두려워하면서!...
다음 생이 이어진다면,나는 무엇으로 태어날까?
그래 새야! 새! 독수리로 태어나서 히말라야 산군을 마음껏 날아다니고 싶다.
6년전 네팔 트리뷰반 공항에서 휘청휘청 처박힐 것 같은 12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를 날아다닌 것처럼!...
"사자의 서" 바르도
요즘 들어 사자의서와 바르도가 새로운 키워드로 오락가락한다.
바르도(Bardo)는 불교에서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로 이어지는 중간적 존재인 중유(中有, antarabhāva)를 말한다. 중음(中陰), 중간계(中間界)라고도 번역한다. 바르도는 티베트 불교의 용어이다.
불경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 생유(生有) ② 사유(死有) ③ 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④ 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사십구재다.
내 마음속 폐허!
히말라야에 간다고 마음속의 폐허가 복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천 미터 쏘롱 페디를 넘는다고 폐허 속의 잡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히말라야에서 만나고 싶은 것은 영혼의 안식이다.
인간은 길 위에 서 있는 존재다. 누구나 홀로 걸어가야 한다. 우리가 걷는 길 위에는 눈부신 설산, 바람과 파란 하늘이 있다. 우리는 어느 만큼 길을 가다가 자연이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동안만 우리는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설산을 흐르는 바람 같은 존재라는 것을....
내 삶이 일상성에 매몰되어 존재 가치가 무의미해져 버릴 때, 오로지 누가 더 돈을 잘 버는지! 30년 전 강남 에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3일 날밤을 세서 딱지 한 장 받아야만!.. 돈 버는 기계로서 인간의 값이 셈해지고, 소유한 자산의 총량에 따라 인간의 층위가 설정되는 오늘의 현실이 구역질 나게 싫을 때.
그 구역질 나는 틈 속을 헤집고 들어가 있었던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떠나야 한다.
인생 3 모작 120 시대라고 하지만, 이미 절반도 훌쩍 넘게 살아버린 시간 속에서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이제는 삶의 내리막길로 접어들어야 한다는 절박감과 허무의 감정이 몸서리쳐 올 때, 어찌 떠나고 싶지 않으랴.
남을 대하는 얼굴은 사회적 자아가 있고 우리 몸속엔 습관의 총체적 축적이 지어냈을 자의식이 있으며 그 자의식에 최저층 안쪽에 비로소 내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숨겨진 자신의 모습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생명의 갈림길! 죽고 사는 한순간의 공포가 엄습해올 때!
데스 존(death zone)에 들어설 때야 비로소 숨겨진 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과연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히말라야가
내 삶에 대한 고민의 해답을 갖고 있단 말인가!
하필이면 꼭 히말라야 인가?
꼭 거기를 가야만 내 마음속의 나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삶의 문제를 푸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일뿐이다. 히말라야는 그저 거기에 무심하게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삶에 있어서 낯선 환경은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토양이 되기도 한다.
암! 그래! 그래 떠나야지!
대지의 여신 초모랑마 별이 된 사람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를 티베트어로 초모랑마로 부름)
2016년 이맘쯤이다. 인도를 한 달여 방랑할 때 인도 다르질링에서 네팔 국경을 넘은 적이 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갔고, 거기서 오캠(오스트레일리아 캠프)을 갔는데 그때 바라본 히말라야 설산! 마차푸차레는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태껏 땅바닥만 보고 살았던 나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삶이 삐걱거릴 때마다. 안나푸르나 女神은 나에게 손짓을 했다. 무언 지는 모르지만,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년 새해가 오면 히말라야를 가는 것을 목표로 정하곤 했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 돌듯 , 들들 거리는 불만! 삶의 족쇄가 늘 나를 옥죄어 번번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가슴속에 절절하게 와닿았던 사건이 있었다.
진짜 괜찮은 놈 박무택
엄홍길은 박무택을 부를 때 '진짜 괜찮은 놈'이라고 부른다.
2004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등반대장 박무택은 세계의 지붕(8,850m)에 우뚝 섰다. 아직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후배 장민과 함께. 박무택은 1996년 가셔브룸 2(8,035m)에 오른 이후 8,000m급 정상만
무려 다섯 개, 에베레스트는 두 해 전인 2002년에 이미 오른 바 있는, 한국 산악계를 이끌 차세대 주자였다.
장민 역시 스물두 살 되던 해인 2000년에 시샤팡마(8,027m)와 초오유(8,201m)에 오른,
어리지만 만만치 않은 경력을 가진 신예였다. 초조하게 두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던 저 아래 6,400m 지점의 ABC(전진캠프)는 박무택의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 “여기 정상입니다!” 한 마디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떠나온 산악부 OB와 YB는 에베레스트가 떠나가도록 함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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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안 좋습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장민이가 탈진했습니다!” 이번에도 박무택의 무전이었다. 위치는 정상 아래 에베레스트 북동면에서도 가장 험난한 암벽 구간인 세컨드스텝(8,600m) 위였다.
얼음과 바위가 뒤섞여 있어 등반이 곤란하고 심지어 그 아래턱은 오버행(Overhang) (암벽이나 빙벽의 일부가 처마처럼 튀어나온 부분)이었다. 다시 박무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이 안 좋습니다. 설맹이 옵니다. 앞이 안 보입니다.” 절망적이었다.
끔찍한 조난 상태에 빠진 그들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함께 정상에 올랐던 셰르파는 이미 하산한 뒤였다.
박무택은 결단을 내렸다. “민아, 너 먼저 내려가라.” 눈시울이 붉어진 장민은 혼자 갈 수 없다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박무택의 결단은 확고했다. “야 이 새끼야, 여기 있으면 우리 둘 다 죽어!
너라도 빨리 내려가! 내려가서 구조대를 올려 보내야 될 거 아냐!” 박무택은 그렇게 후배 장민을 먼저 내려 보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천지에 얼음보다도 차가운 바람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산소통 계기판의 바늘도 0을 향해 가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을 포기한 박무택은 비박을 감행했다. 이때 시각이 오후 3시. “더 이상 못 움직이겠습니다…. 비박을 해야겠습니다.” 그로부터 40분 후, “고통스럽습니다…. 못 견디겠어요…. 산소가!
박무택과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오후 1시경에 먼저 내려보낸 장민으로부터도 연락이 끊겼다. 장민은 무전기가 없었다. 그와 통신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절망에 빠진 원정대는 베이스캠프 20여 개의 외국 원정대들을 직접 찾아가 구조 활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탈리아 원정대와 셰르파가 사고 지점으로 급파되기도 했지만 현장에 도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이 그를 구하러 올라갔다. “내가 가서 무택이를 데려올게!” 같은 원정대의 부대장 백준호였다.
탈진한 채로 설맹에 걸려 해발 8,750m 부근에 고립되어 있는 사람! 박무택을 홀로 구조하러 가는 것, 이성적으로는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백준호와 박무택은 이성적 판단이 침범할 수 없는 사이다. 산속에서 수많은 밤을 함께 보낸 산악회의 후배였고, 술자리에서 수많은 잔을 함께 기울인 정겨운 동생이었다.
백준호 고독한 등반 세컨드 스텝
2004년 5월 18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백준호는 한국 등반사상 가장 외롭고 고독한 등반을 해냈다. 오직 박무택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에베레스트의 최 난구 간 세컨드스텝을 홀로 돌파해냈다.
이튿날 새벽 6시경 백준호의 목소리가 ABC로 들려왔다.
“대장님, 무택이 만났습니다! 상태가 안 좋습니다! 밤새 무산소에 노출되었고, 손과 코에 동상이 심합니다. 완전 탈진 상탭니다! 저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동상 상태와 먼저 내려간 장민의 소식을 되물었지만
백준호의 목소리도 이미 기력이 쇠잔해 있었다. “장민이는 못 봤어요. 지금 2도 동상인데 조만간 3도로 진행될 것 같아요!” 절망적이었지만 그보다 시급한 것은 두 사람의 생환뿐이었다.
그러나 백준호도 마지막 목소리를 남기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여기가 8,700m가 넘어서 구조가… 구조가 어렵습니다….”
세븐 서미트(Seven Summits 7 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는 것)의 일환으로 에베레스트를 찾았던 여성 산악인 오은선이 사고 지점을 향해 출발한 것은 5월 20일 새벽이었다.
세컨드스텝을 오른 직후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서 보니 누군가가 고정 자일에 매달린 채 비스듬히 눕다시피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은선은 소속팀 원정대장에게 최후 판결문과도 같은 보고를 올렸다.
“무택이 죽었습니다.…. 고정 자일에 묶인 채 숨져 있어요…. 준호는 안 보입니다.”
설맹으로 앞이 안 보인다.
후배 장민도 탈진 상태다. 탈진상태인 장민에게 나를 데리고 내려가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박무택 대원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후배 장민에게 먼저 내려가서 세르파를 데려오라고 한다.
8천7백 미터 얼음 위에 혼자 있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한다.
장민과 헤어지고 나니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
무전기에서는 뭐라고 소리가 나는데 아마도 저체온에 들지 않게 베이스캠프에서 나를 깨우는 소리인 거 같다.
날이 저문다.
나는 설사면 위에 누워버린다.
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릴 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0년 봄 홍길 형과 칸첸중가(8천5백86m) 원정 때 형과 비부악(텐트 없이 설사면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
을 하고 다음날 아침 정상을 밟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데!!
함께 동행한 장민 역시 죽음을 예견하고 혼자 내려갔지만, 그도 역시 죽음의 행렬에!...
그는 시신도 찾지 못했다.
영화에서 매스컴에서는 조명이 안된 한 사람이 있었다.
계명대 원정대 부대장으로 참여한 백준호다. 8천 미터 얼음절벽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구하러 간 자신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박무택을 구한다고 8천 미터를 오른 백준호는 아마도 죽음을 예견하며 올랐을 것이다.
“무택이는 그렇게 죽을 놈이 아니야!”
엄홍길이 박무택의 조난 소식을 들은 것은 얄룽캉(8,505m)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뭐라고? 무택이 가 어쨌다고? 무택이 가? 나랑 같이 다니던 그 계명대 박무택이가?” 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도리가 없어 혼잣말처럼 떠들어댔다. “기다려봐! 무택인 안 죽어! 지금 그냥 무전이 안 되는 것뿐이라고! 무택이 걔는 그렇게 죽을 놈이 아니야! 그놈이 얼마나 강하고 끈질긴 놈인데…!”
엄홍길과 박무택의 인연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명대 산악회가 히말출리(7,893m) 원정대를 꾸려 떠났을 때, 엄홍길은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빌라 에베레스트를 경영하고 있었들다.
그리고 둘은 첫 만남을 가졌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이후 등반 파트너로서 2000년 칸첸중가(8,586m)와 K2(8,611m), 2001년 시샤팡마, 2002년 에베레스트를 함께 올랐다.
박무택이 조난당하기 훨씬 전부터 엄홍길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다. “무택이는 나한테 등반 파트너 이상이에요. 그놈은 내 친동생이에요.”
시작은 계명대 산악회 OB, 그중에서도 맏형 격인 손칠규였다. 쉽지는 않았다. 계명대 산악회 OB로는 구성에 한계가 있었다. 손칠규는 엄홍길에게 도움을 청했고,
장헌무와 박창수 등 국내 베테랑 산악인들이 합류했다. 목표는 시신의 위치가 확인된 한 사람(박무택)과 실종된 두 사람(백준호와 장민)을 모두 찾아내어
그들을 적어도 베이스캠프까지 후송하는 것이었다. 국내외 산악계의 중평은 ‘불가능하다’는 쪽이었다. 8,750m는 세계 제2위 봉인 K2보다도 더 높은 곳이다.
세계적인 산악인들 역시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목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휴먼원정대가 결성되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정식 원정대원으로 참여하게 된 사람은 모두 18명이었다.
엄홍길, 손칠규, 고인경, 정오승, 박근영, 이길봉, 장헌무, 전경원, 김인환, 김동민, 임채유, 이원영, 박창수, 송인혁, 이춘근, 김세준, 오종택, 심산이 그들이다.
산악계의 전설들부터!.. 계명대 산악부 동기와 후배들에 베테랑 언론인까지. 세계 등반 역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을 위해 휴먼 원정대원들이 모였다.
휴먼원정대 시신인양팀은 2005년 5월 16일 두 달의 준비 끝에 실행에 돌입했다.
히말라야 神은 그리 호락호락 품에 안아주지 않았다.
베이스캠프에서 수차례 시도 끝에 출발 13일 만인 5월 29일 해발 8,570m 지점에 엄홍길 대장은 도착했다.
'무택아 무택아 얼마나 추웠느냐!
나만 살아서 미안하다. 무택아! '
눈물 콧물이 뒤섞인 통곡이 이어졌지만 대답이 없었다.
고도 8천 미터 눈과 얼음 속에서 시신을 데려오는 것은 더 큰 사고의 위험성이 커 양지바른 곳에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내려왔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가 8천 미터 얼음 봉우리에 홀로 서있는 꿈을 자주 꾸었다.
#박무택시신인양 동영상보기
8천8백48미터
대한민국 지식포럼 은 시인 대학을 운영한다. 벌써 6기를 진행하고 있다.(1기 10주)
2기가 시작될 무렵, 회장이 참여를 안 하면 말이 되느냐! 10주를 마치고 느닷없이(?) 나는 시집을 한 권 냈다. 그 시집에
박무택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며 적었던 글 한편이 있다.
8천8백48미터
2004년 5월 18일 오전 10시 10분
8천8백49미터
세계 최고봉
나는 후배 장민과 초모랑마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길이다
장민이 탈진을 호소한다
나는 설맹으로 앞이 안보이니 움직이기 어렵다
생사를 가르는 판단
장민에게 먼저 내려가 셰르파를 데려오라고 했다.
8천7백 미터에서 혼자 있다는 것은...
세상과 이별을 한다는 의미다
어둠이 감싸고 죽음이 흐른다
초모랑마
정상 아래는 천국과 지옥이 함께 한다.
한가닥 희망
내가 살 수 있는 작은 기적이라면
텐트가 있는 캠프 3 까지는 가야 한다
그러나 한 발짝도 더 움직일 수 없다.
내시경 검사 때
수면마취가 된 것처럼 흐릿하고 가물가물하다
무전기에서는 나를 불러댄다.
삐 삐 삐
박무택 박무택
응답 바란다
무택아
나는 소리를 질러보지만 입언저리만 달싹거릴 뿐
내가 살기 위해서 정상을 밟은 것이지 죽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
어둠은 더욱 빠르게 밀려온다
더 이상 버틸힘이 없다
나는
로프에 매달려 하얀 눈 위에 누워 버린다
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모든 것이 멀리 떨어져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름답게 빚 나는 보라색 정상 주변
롱북 빙하는 안갯속에서 강물처럼 흐른다
골골 거리는 마지막 숨소리는 얼마나 오래갈까
태양은 정상에 금빚을 쏟아붓는다.
나는 존재하지만 의식은 없어진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검은색과 흰색만 존재하는 하늘 아래
내 육체는 굳어가고 영혼은 다시 자라나겠지
조지 멀로리의 시신도 75년이 지난
1999년 5월 1일 발견되었다
아마
나는 한 백 년쯤 누워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우리 아내 그리고 석민아 안녕
달이 지고 있다
세상이 지고 있다
하느님 달을 멈춰 주소서
죽음과 마주한 인도방랑
6년 전 가트(시신 태우는 화장터)에 나는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좁디좁은 바라나시 골목은 죽음을 부르는 소리로 가득하다."람람 싸드야 헤"(신은 알고 계신다) 상여꾼들의 외침이다.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강이 흐른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원한 갠지스 강이 그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한 뒤 이 갠지스 강에
뿌리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힌두교도들의 믿음 때문이다.
새빨간 불꽃 매캐한 연기!
시체가 타면서 뿜어내는 냄새는 누군가는 구역질 난다고 하겠지만 나는 삼겹살 구울 때 냄새와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 그 냄새가 어떤 방랑자의 코의 점막을 자극하고 이를 뇌세포가 기억해 놓을 때,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충격적 체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구별된다. 돈이 많은 사람은 최고 좋은 백단향 나무 망고 나무 보리수나무를 사서 시체를 불태우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돈만큼 나무를 사서 시체를 태우고 나무가 없으면
타다만 시신을 그대로 강가에 던져 버린다. 한 노인이 시신 위에 장작을 쌓는다. 유가족들은 그저 덤덤하게 바라볼 뿐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다. 죽음이란 고통스러운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신이 타들어가는 바로 그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날 아침에 먹은 식기를 설거지하는 아낙의 모습, 시체의 타다 남은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강물에서 몸을 씻는 사람들!
집 나온 개들이 어슬렁 거리며 타나남은 시체 덩어리를 물고 남은 살점을 뜯어먹는 풍경이! 염소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발정 난 소는 짝을 찾는다. 죽음은 바로 삶의 현장이다.
'이게 지금 무슨 짓들이 야'
‘모든 것이 다 개판이군’, 썩을 놈의 동네! 하고 혀를 차는 당신은 과연 옳은가? 이런 낯섦에 넌더리를 낼만도 한데!..
나는 가트에 종일 앉아서 불구경을 했다.
"죽음"
언젠가는 모두가 가는 길이다.
메 멘트 모리
방법이야 다르겠지만, 인간은 그 길을 가야 한다. 가장 확실한 미래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갠지스강에 어둠이 내리면, '다샤스와메드 가트에 사람들이 모인다.
이곳은 힌두교 창조의 신인 브라마가 10마리의 말로 희생제를 지낸 곳이다. 이곳에서는 매일 밤 갠지스 여신에게 바치는 종교의식인 아르띠 뿌자가 거행된다.
죽음은 축제다.
아르디 뿌자(바라나시 가트에 해가지면 영혼을 위한 제사의식)를 보기 위해 계단에 많은 사람들이 이 의식에 참석한다. 자리가 없어 갠지스강에 배를 타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의식을 진행하는 브라만은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공간 바람, 불, 물, 땅을 종소리와 램프 연기 뱀 모양의 불 바람을 의미하는 부채 등을 이용하여 형상화한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만트라 외는 소리가 연기와 함께 하늘로 피어오른다. 천지를 진동하는 뿔피리 소리가 신을 향해 울려 퍼진다.
흐르는 갠지스 강물을 따라!!
흩어지는 연기를 따라!..
무능이 죄가 되지 않고!..
지친 삶을 한 번쯤 되돌아볼 수 있는 그곳
자연과 생명 그리고 영혼을 이야기하는 곳
그날 화장을 한 사람들! 한 줌의 재로 갠지스강에 뿌려진 영혼들을 위하여 뿌자 의식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고달픈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생하셨소 당신이 지은 죄와 업은 갠지스강에 다 버리고 천국의 계단에 오르시오. 그리고 새로 태어나 마음껏 날아오르시오'
'죽음 뒤에도 집은 있어야 하니 부디 좋은 방 하나 얻어 오늘 밤 편히 주무시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음을!
삶이란 게 다 이런 것이다네!
나는 히말라야로 떠난다.
내일이면 신이 부르는 그곳으로 떠납니다.
네 히트(네이버 히말라야 트레킹 카페) 운영진 그리고, 모든 분 감사합니다.